2025년 4월 11일 금요일.
남한상성 남문에서 북문까지 갔다가 다시 남문까지 돌아오는 산책을 했어요.
약 2시간 정도 소요된 것 같아요.
봄바람에 벚꽃이 하늘거리고 산책하기 딱 좋은 날이었어요.
이제부터 저랑 같이 가보실까요?
렛츠고우!

오전 9시 30분, 남한산성도립공원남문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산책에 나섭니다.
(사진은 산책을 하고 내려와서 11시 30분쯤 찍은 사진)
남한산성도립공원남문주차장에서 남한산성 남문쪽으로 올라가는 길(사진 속 왼쪽 길)
사진 속 오른쪽 길은 산성터널로 가는 도로.
남한산성 남문(지화문) 앞에는 이런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어요.
전체 사진으로 보기에는 어렵네요.
남한산성 남문(지화문)은 지금 보수 공사를 하고 있다.
지화문 밖으로 나가 봅니다.
밖에서 본 지화문.
정조3년 성곽을 개보수할때 지화문이라 칭하였고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문이며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 있다고 한다.
지화문.
남한산성에는 동, 서, 남, 북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그중 남문은 남한산성의 성문 중에서 가장 크고 웅장하며 가장 출입이 많은 문으로 실제 남한산성의 정문이라고 볼 수 있다.
성문은 높이 4.75m, 폭 3.35m, 길이 8.6m의 홍예문으로 홍예기석 위에 17개의 홍예석을 쌓아 만들었다.
병자호란 때 인조가 이 문을 통과하여 피신해 들어왔다고 전해진다.
오늘 저는 남한산성 남문(지화문)에서 서문(우익문)을 거쳐 북문(전승문)까지 가볼려고 합니다.
활짝 꽃망울을 터뜨린 진달래를 보면서 산책하니까 완전히 힐링됩니다.
남한산성 둘레길은 이렇게 보행하기 쉬운 콘크리트 포장길도 있고 성곽을 따라 도는 성곽길도 있어요.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편하신대로 이용하시면 됩니다.
이정표.
수어장대와 우익문쪽으로 가는 성곽길을 따라 올라 갑니다.
남한산성은 청량산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연주봉, 동쪽으로 벌봉과 한봉을 연결한다.
해발 500미터 내외의 자연지형을 따라 둘레 12km가 넘는 성벽을 구축하여 많은 병력으로도 쉽게 공략할 수 없는 지리적 여건을 구비하고 있다.
남한산성은 1907년 일제에 의해 많은 건물이 파괴되었으며, 1917년 성내에 있던 광주군청이 산성밖으로 이전하면서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잔털제비꽃.
공원 관리하시는 분들이 지난 겨울 폭설에 쓰러진 소나무를 잘라서 모아 놨네요.
대부분의 활엽수는 겨울에 잎이 없으므로 눈이 내려도 거의 피해가 없지만,
소나무잎은 눈을 받아서 모으는 그릇 역활을 하므로 나무가 통째로 뽑히거나 가지가 부러지게 됩니다.
가지가 잘린 소나무.
아까비!
남한산성도립공원 안에는 화장실이 중간 중간에 있어서 전혀~ 불편하지가 않아요.
화장실은 약 700미터 간격으로 설치되어 있는 듯 합니다.
도립공원이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보니 이정표 관리가 참 잘되어 있어요.
서울제비꽃.
한국 특산종.
제비꽃 꽃말은 순진한 사랑, 나를 생각해주세요.
수어장대 밖 성곽에서 바라 본 풍경.
멀리 롯데타워가 보입니다.
청량당.
청량당은 남한산성을 쌓을 때 동남쪽 축성의 책임자였던 이희 장군과 그의 부인 넋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사당이다.
이희는 공사비를 횡령했다는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했고, 이 소식을 들은 부인은 한강에 몸을 던져 따라 죽었다.
이희는 죽을 때, 자신의 죄가 없으면 매 한 마리가 날아올 것이라고 예언을 했는데 과연 매 한마리가 날아와 그의 죽음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후에 누명이 벗겨지고 그가 맡은 공사가 가장 잘 된것으로 알려지자 사당을 지어 초상을 안치하고 넋을 기렸다.
원래의 청량당은 6.25전쟁때 소실되어 다시 지었다.
서장대가 있는 산 이름이 청량산이므로 청량당이라고 이름 지었다.
수어장대.
장대란 지휘와 관측을 위해 군사적 목적으로 지은 누각 건물로 남한산성에는 5개의 장대가 있었다.
수어장대는 남한산성의 서쪽에 있어 본래 '서장대'라고 불렀다.
병자호란 당시에는 단층 누각이었고, 수어청 우영장이 서장대에 머물며 군사를 지휘하였다.
수어장대 바닥은 이런 모습입니다.
수어장대 옆의 소나무,
남한산성 사적비.
무망루.
1751년 (영조 27년) 광주유수 이기진이 증축한 수어장대 2층 내편의 문루로써 그 편액이 2층 누각에 있어 1989년 전각을 건립하고 이 안에 현판을 새로 설치, 일반인이 볼 수 있게 하였다.
무망루는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간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 갔다가 귀국 후 북벌을 꾀하다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이름 지은 것이다.
무망루 옆의 대동령각하 행차 기념 식수비.
단기 4286년이면 1953년이네요.
그때는 이승만대통령 때군요.
수어장대와 청량당 주변 모습.
수어장대에서 서문쪽으로 가는 길.
자동차가 여기까지!
조금 걷는 것도 나쁘진 않답니다.
남한산성 서문(우익문)
성곽을 따라서 갑니다.
큰개별꽃.
남한산성 서문(우익문)에서 내려본 풍경.
멀리 롯데타워가 보인다.
매탄터.
병자호란 때 혹독한 추위 속에서 전쟁을 치른 후 유사시 방어에 필요한 숯을 묻어둔 곳이다.
보통 군포 근처 군기고와 영고 주변에 소금과 숯을 묻었다고 하는데, 이곳은 중간 부분에 지름 5m, 깊이 1m 정도의 구덩이가 파인 것이 이곳에 매장되어 있던 목탄을 태우는 과정에서 생긴 것으로 보인다.
[증정남한지]에 따르면 북장대 군포 앞에서 부터 성내 각 사찰에 이르기까지 숯을 묻어둔 곳이 94곳이고 숯은 24,192석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매탄터 또는 매탄처는 숯을 묻어 놓은 장소라는 의미입니다.
남한산성에는 숯을 묻어 놓은 장소가 곳곳에 있었고 그 양도 상당했다고 합니다.
남한산성에 왜 숯을 묻어 놓은 것일까요?
남한산성은 험준한 산세에 의지해 축조된 농성용 방어산성이었는데요. 농성이라는 것은 적군이 물러날 때까지 성안에서 버티는 전술을 말합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우선 왕과 군대, 그리고 산성 주의의 백성들은 모두 성 안쪽으로 이주합니다.
이때 성 바깥의 논과 밭은 적에게 이용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모두 불태웁니다. 삼국시대의 고구려가 수나라, 당나라와 싸울 때 사람을 모두 소개하고 외부의 물자를 깡그리 불태우는 청야전술을 자주 사용했다고 합니다. 남한산성에는 이런 농성전에 사용할 연료를 항상 성 내부에 비축해 두었는데 보관이 용이하고 연기가 나지 않는 숯은 최적의 연료였습니다.
그래서 남한산성의 주둔군 막사 주위에는 숯을 대량으로 비축해 두었던 매탄처가 남아 있는 것이랍니다.

연주봉 옹성 암문(제5암문)
암문은 일종의 비밀통로로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된다.
남한산성에는 모두 16곳의 암문이 있는데 본성에 11개, 봉암성에 4개, 한봉성에 1개가 설치되어 있다,
연주봉 옹성 암문은 폭 95cm, 높이 180cm로 성 바깥 연주봉 옹성으로 연결된다.
암문 안쪽은 평거식(직사각형)이고 바깥쪽은 홍예식(아치형)이다.
연주봉 옹성 암문 앞의 이정표.
이정표.
지화문에서 우익문을 지난 구간.
남한산성 서문(우익문)을 지나 북문(전승문)쪽으로 가는 성곽길.
음나무(엄나무)순은 아직 깜깜 무소식입니다.
남한산성 북문(전승문).
성 바깥에서 올려본 모습.
남한산성 북문(전승문).
남한산성에는 동, 서, 남, 북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북문은 병자호란 당시 성문을 열고나가 기습공격을 감행했던 문이다.
싸움에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한다는 뜻에서 '전승문'이라고도 하였다. 당시 영의정 김류의 주장에 의해 군사 300명이 북문을 열고 나가 청나라 군을 공격하였으나, 적의 계략에 빠져 전멸하고 말았다. 이를 범화골전투라 하는데,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있었던 최대의 전투이자 최대의 참패였다.
1779년(정조3년) 성곽을 개보수할 때 성문을 개축하고 이름을 붙여 전승문이라 한것은, 그때의 패전을 잊지 말자는 뜻이었을 것이다.
선조 때의 기록을 보면 산성 내에 동문과 남문, 수구문의 3개의 문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북문은 1624년(인조2년)에 신축된 성문으로 생각된다.
어느 학교에서 온 것일까?
단체로 오신 분들이 삼삼오오 모여있다.
성벽을 기준으로 안과 밖으로...
전시에는 치열한 공방의 장이었을 터.
남한산성 북문(전승문)에서 발걸음을 돌린다.
남한산성 서문(우익문)쪽으로 올라가면서 내려 본 전승문.
성벽 위 돌담에 핀 서울제비꽃.
부처님 오신 날 준비로 바쁜 국청사.
돌아가는 길에 다시 들려 본 남한산성 서문(우익문).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서문은 4개의 대문 중 규모가 가장 작고, 산성을 처음 쌓았을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779년(정조 3년)에 다른 문과 같이 개축하며 우익문이라 칭하였다. 행궁을 중심으로 국왕은 남쪽을 바라보며 국정을살피니, 서문이 행궁 우측에 있어 우익문이라 하였다. 서문은 1637년 1월 30일 인조가 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항복하기 위해 남한산성을 나간 바로 그 문이다. 남한산성의 서쪽 사면은 경사가 급해 물자수송이 어렵지만 광나루나 송파나루 방면에서 산성으로 진입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남한산성은 많은 사람들이 찾는 역사와 문화의 현장입니다.
문화시설은 잘 보전관리되고 있고 편의시설도 불편하지 않아 나들이하기에 참 좋은 곳입니다.
어렵쇼?
남한산성 성곽길에서 반가운 어수리를 봅니다.
대박!

임금님 수라상에 올랐다는 어수리.
무갑산 계곡가에서나 볼법한 어수리를 여기서 보다니...
어수리는 취나물이랑은 다른 특유의 향이 있는 맛있는 나물입니다.
생으로 쌈채로도 훌륭하답니다.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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